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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

by snowflake-blog 2025. 2. 26.

1. 고려 말의 혼란과 홍건적·왜구 침략의 배경: 내부 분열과 외부 위협

14세기 고려는 심각한 정치적·사회적 혼란 속에서 외부의 침략을 맞이해야 했다. 고려는 13세기 중반부터 약 100년간 원나라(몽골)의 간섭을 받으며 정치적 자주성을 잃었고, 원 간섭기 동안 권문세가(權門勢家)들이 권력을 독점하며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다. 특히, 공민왕(재위 1351~1374)이 즉위하면서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개혁을 추진했으나, 기존 기득권 세력인 권문세가들의 반발과 내분으로 개혁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고려 내부의 혼란을 틈타, 외부에서는 강력한 군사적 위협이 가해졌다. 특히,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가 고려를 침략하면서 나라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정도의 위기를 초래했다. 홍건적은 중국 원나라에 반기를 든 반란군으로, 명나라 건국 이전 한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침략을 감행했다. 한편, 왜구는 일본의 해적 집단으로, 고려의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약탈과 침공을 일삼았다.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은 고려 말 사회의 혼란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려 정부는 원나라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독립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군사력과 행정력이 약화된 상태였으며, 그 결과 홍건적과 왜구에 대한 대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고려 왕실과 귀족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국가의 방어력이 더욱 약해졌고, 이는 외부 세력에게 침략의 기회를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고려의 국가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고려의 수도 개경이 함락되는 사태가 발생했으며, 국왕이 피난길에 오르는 등 고려 역사상 유례없는 혼란이 이어졌다. 이러한 외부의 침략은 고려의 정치·군사 체제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냈고, 결국 조선 건국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 홍건적의 침입과 고려 수도 함락: 개경이 불타다

홍건적은 원나라의 폭정과 부패에 반발하여 1351년 중국에서 일어난 반란군으로, 주원장(朱元璋)이 이끄는 세력과 더불어 원나라를 몰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부 홍건적 세력은 독자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고려까지 침략하게 되었다.

고려를 침략한 홍건적은 두 차례에 걸쳐 공격을 감행했다. 1차 침입(1359년) 때 홍건적의 4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평안도 지역을 공격했지만, 고려의 반격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2년 후, 더욱 강력한 병력을 갖춘 홍건적이 다시 침입하면서 고려의 수도 개경이 함락되는 대사건이 벌어졌다.

 

2차 침입(1361년) 때 홍건적은 약 2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군은 초반에 저항했으나, 홍건적의 빠른 진격을 막지 못하고 수도 개경이 함락되었다. 당시 고려 조정은 홍건적의 압도적인 병력 앞에 무너졌고, 공민왕은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이 과정에서 개경은 약탈당하고 불태워졌으며,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홍건적의 개경 점령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공민왕은 충주로 이동한 후 반격을 준비했으며, 고려군은 홍건적을 몰아내기 위해 전열을 정비했다. 이때 고려군을 이끈 주요 인물은 이성계, 지용수, 안우, 김득배 등이었다. 이들은 홍건적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고, 결국 고려군은 반격에 성공하여 홍건적을 개경에서 몰아냈다.

홍건적의 침입은 고려에 큰 충격을 주었다. 수도가 함락된 것은 고려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으며, 공민왕의 개혁이 진행되는 가운데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 체제가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또한, 고려의 방어 체제가 허술하다는 점이 드러났으며, 이를 계기로 군사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

3. 왜구의 지속적인 침략과 고려의 대응: 해안 지역의 붕괴

홍건적의 침입이 한반도의 내륙 지역을 황폐화시켰다면, 왜구는 고려의 해안 지역을 끊임없이 공격하며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왜구는 14세기 내내 고려의 서남해안과 동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잦은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으며, 고려의 경제와 국방 체제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왜구는 일본의 해적 세력으로, 원래는 일본 내에서도 반정부 세력으로 활동하던 자들이었다.

원나라의 일본 원정 실패 이후, 일본에서는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졌고, 이를 틈타 왜구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고려를 지속적으로 침략하게 되었다. 이들은 작은 배를 이용해 기습적으로 고려의 연안 지역을 공격했고, 약탈한 후 빠르게 도망치는 전술을 사용했다.

 

왜구의 침략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는 **공민왕 시대(14세기 후반)**였다. 특히, 1376년 왜구는 충청도 지역까지 침입하여 청주성까지 공격하는 등 내륙 지역까지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고려 조정은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려 했지만, 기동성이 뛰어난 왜구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왜구를 격퇴한 대표적인 인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최영이성계였다. 최영은 1376년 홍산대첩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으며, 이성계 역시 1380년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황산대첩에서는 이성계가 기습 작전을 활용해 왜구를 완전히 포위한 후 전멸시켰으며, 이를 통해 고려의 국방력이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왜구의 침략은 단순한 군사적 문제를 넘어 고려 사회의 구조적 한계를 노출시켰다. 고려 정부는 지방 방어 체제가 약화된 상태였으며,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백성들은 지속적으로 피난을 다녀야 했다. 특히, 해안 지역 경제가 붕괴되면서 고려의 상업과 농업 기반이 약화되었으며, 이는 고려의 국가 재정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4. 홍건적·왜구의 침략이 고려에 미친 영향: 국가의 몰락과 조선 건국의 계기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은 고려 말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인해 고려의 방어 체제는 크게 흔들렸고, 국가의 통치력은 약화되었다. 수도 개경이 함락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며 고려 조정은 백성들의 신뢰를 잃었고, 이는 고려 왕조의 몰락을 앞당기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군사 지도자들이 부상했다. 대표적으로 이성계최영이 그 주역이었으며, 이들은 고려 말 정치의 핵심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이성계는 왜구 토벌을 통해 군사적 입지를 굳혔으며, 이후 **위화도 회군(1388년)**을 통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은 고려 왕조가 더 이상 국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고려 말 신흥 세력인 신진 사대부무장 세력이 결합하며, 새로운 왕조인 조선이 탄생하는 역사적 흐름이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