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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공민왕의 개혁 정치와 신진 사대부의 등장

by snowflake-blog 2025. 2. 25.

1. 공민왕의 즉위와 개혁의 배경: 원 간섭기의 쇠퇴와 자주성 회복의 열망

14세기 중엽,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 아래 정치적·군사적 자주권을 상실한 상태였다. 1259년 원에 항복한 후 약 100년간 고려는 원의 부마국으로서 외교, 정치, 군사, 문화 등 다방면에서 원의 지배를 받아왔다. 고려 왕실은 원 황실과의 혼인으로 정통성을 약화시켰으며, 원에서 파견한 다루가치가 고려 내부의 정치와 행정을 간섭했다. 또한, 고려는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했고, 공녀(貢女)와 같은 인적 자원까지 원으로 끌려가야 했다.

 

그러나 14세기 들어 원나라의 국력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중앙아시아와 중국 내의 반란, 내부 권력 다툼 등으로 인해 원의 통제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이 틈을 타 고려는 자주성을 회복할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1351년 공민왕(재위 1351~1374)이 즉위했다. 공민왕은 원 간섭기 동안 형성된 고려의 왜곡된 권력 구조를 바로잡고,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진 군주였다.

 

공민왕은 즉위 초부터 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고려의 실질적인 정치적 독립을 이루기 위해 원의 지배 기구를 철폐하고, 왜곡된 사회·경제적 구조를 개편하고자 했다.

특히, 권문세가라 불리는 고려의 지배 귀족층이 원 간섭기 동안 막대한 토지와 권력을 독점하며 국가 재정을 약화시키고 농민을 착취하는 현실을 바로잡는 것이 개혁의 핵심 목표였다.

 

공민왕의 개혁은 단순한 정치적 독립을 넘어서, 고려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 계층인 신진 사대부가 정치 무대로 등장하게 되었고, 그들은 공민왕의 개혁을 적극 지지하며 향후 조선 건국의 주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2. 공민왕의 개혁 정치: 자주성 회복과 권문세가 견제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부패한 권문세가의 특권을 견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의 개혁은 크게 정치·군사·사회·경제 분야에서 전개되었으며, 고려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먼저, 정치적 개혁으로 공민왕은 고려 내부에 설치된 원나라의 통치 기구를 철폐했다.

대표적으로, 고려 내의 실질적인 지배 기구였던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원에서 파견된 다루가치를 철수시켰다. 이로써 고려는 원의 직접적인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내정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공민왕은 원과의 혼인 관계를 끊고, 원 황실과의 거리를 두는 정책을 시행했다.

 

군사적 개혁 역시 중요한 과제였다. 공민왕은 북방 영토 회복을 목표로 삼았으며, 원 간섭기 동안 원에 빼앗긴 지역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1356년에는 원의 통치 기관인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함흥 일대의 영토를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공민왕은 무신 이성계지용수 같은 유능한 장군들을 중용했으며, 이는 향후 조선 건국의 기반이 되었다.

 

공민왕 개혁의 핵심은 사회·경제적 개혁에 있었다. 고려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권문세가의 부정 축재와 토지 겸병이었다. 권문세가는 대농장(장원)을 운영하며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했고,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는 주범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민왕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했다. 이 기구는 불법적으로 겸병한 토지를 몰수하고, 권문세가가 차지한 토지를 국가에 환수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강제로 노비로 전락한 농민들을 해방시키는 작업도 병행했다.

이러한 개혁 조치는 권문세가의 강한 반발을 초래했다. 특히,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되는 것을 두려워한 귀족들은 공민왕의 개혁을 방해하려 했고, 조정 내에서도 갈등이 격화되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강력한 의지를 바탕으로 개혁을 추진했고, 신진 사대부의 지지를 통해 점차 개혁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또한, 공민왕은 불교계 개혁에도 나섰다. 고려 시대 불교는 국교로서 막대한 권력을 누렸지만, 원 간섭기 동안 불교계의 타락과 부패가 심화되었다. 공민왕은 불교계의 재정과 토지 운영을 감시하고, 타락한 승려들을 척결하며 불교 본연의 모습을 회복시키려 했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고려의 자주성 회복과 사회 개혁을 위한 강력한 시도였지만, 동시에 권문세가의 강한 반발과 내부 갈등을 초래하며 고려 사회에 새로운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3. 신진 사대부의 등장: 개혁의 동반자이자 조선 건국의 주역

공민왕의 개혁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 세력인 신진 사대부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고려 후기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며, 향후 조선 건국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신진 사대부는 고려 중기 이후 과거제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지식인 관료층으로, 대부분 지방의 중소 지주 출신이었다.

 

신진 사대부들은 기존의 권문세가와는 달리, 출신 배경이나 경제적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했지만, 학문적 능력과 개혁 의지를 바탕으로 중앙 정계에서 영향력을 키워갔다. 이들은 주로 성리학을 학문적 기반으로 삼았으며, 성리학을 통해 사회의 윤리적 질서를 바로잡고자 했다. 기존 불교 중심의 세계관과는 다른 새로운 지식 체계를 받아들이며, 고려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공민왕은 자신의 개혁을 추진하는 데 있어 신진 사대부를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특히, 토지 개혁과 권문세가 견제를 위해 이들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진 사대부들은 전민변정도감의 실무를 맡아 권문세가의 불법적인 토지 겸병을 조사하고, 농민들을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신진 사대부들은 정치적 경험을 쌓으며, 고려 사회의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신진 사대부들은 정치적 개혁뿐 아니라, 사상적 변화를 주도했다. 그들은 성리학을 통해 새로운 국가 이념을 세우려 했으며, 불교의 타락과 부패를 비판했다. 불교가 권문세가와 결탁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을 비판하며, 사회의 도덕적 회복을 주장했다. 이는 이후 조선 건국 이후 성리학 중심 사회가 확립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신진 사대부 내에서도 두 가지 성향이 존재했다. 하나는 온건파로, 대표적으로 정몽주가 있었다. 온건파는 공민왕의 개혁을 지지했지만, 기존의 고려 왕조 체제를 유지하며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했다. 반면, 급진파인 신흥 무인 세력과 결합한 혁신파는 보다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했으며, 이후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도전, 조준 등이 있다.

신진 사대부의 등장은 고려 후기 사회의 중요한 변화를 상징하며, 기존의 권문세가 중심의 정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공민왕의 개혁을 통해 성장했고, 이후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4. 공민왕 개혁의 한계와 신진 사대부의 유산: 고려의 몰락과 조선 건국의 기반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고려의 자주성 회복과 사회 구조 개혁을 위한 중요한 시도였지만, 여러 한계에 부딪히며 완전한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개혁은 권문세가의 강한 저항, 외부의 침략, 내부 정쟁 등의 요인으로 인해 좌절되었고, 결국 공민왕은 1374년 시해당하면서 개혁도 중단되고 말았다.

 

가장 큰 한계는 권문세가의 반발이었다. 공민왕의 토지 개혁과 권력 구조 개편은 권문세가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침해했으며, 이로 인해 귀족층의 거센 저항을 초래했다. 권문세가들은 공민왕을 견제하기 위해 암살을 계획했고, 결국 공민왕은 자신의 신임하던 시종 홍륜과 내시들에 의해 시해되었다. 이로써 개혁 정치는 급격히 약화되었고, 고려는 다시 권문세가 중심의 정치로 회귀하게 되었다.

 

또한, 외부의 홍건적왜구의 침입은 고려 사회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1361년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시키며 고려 조정은 큰 충격을 받았고, 왜구의 해안 지역 약탈로 인해 민생은 더욱 피폐해졌다. 이러한 외적의 침입은 개혁 추진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고려 조정의 무능함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개혁은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특히, 그의 개혁을 통해 성장한 신진 사대부는 이후 조선 건국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신진 사대부들은 고려의 부패한 권문세가 체제를 비판하며, 새로운 국가 질서를 구상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무장 세력과 결합하며, 조선 건국이라는 역사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공민왕의 개혁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조선 건국의 사상적·정치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진 사대부가 성리학을 기반으로 조선을 세웠고, 이는 이후 한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공민왕 개혁의 유산은 조선이 중앙집권적 국가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으며, 고려 후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다.

결론적으로, 공민왕의 개혁신진 사대부의 등장은 고려 후기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 시기는 자주성 회복과 사회 구조 개혁을 향한 치열한 투쟁의 과정이었으며, 이후 조선 건국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되었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와 신진 사대부의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