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갑신정변과 동학농민 운동 : 운동과 저항의 갈림길

by snowflake-blog 2025. 3. 6.

1. 조선 후기의 위기와 개혁 요구: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의 배경

 

19세기 후반 조선은 내부적으로 정치적 부패와 경제적 혼란이 심화되고, 외부적으로는 서구 열강과 일본, 청나라의 압박을 받으며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특히, 세도 정치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졌으며, 관리들의 수탈과 불공정한 조세 제도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적인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개화파(開化派)의 주장과, 전통적인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하면서 외세를 배척해야 한다는 보수적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주장이 충돌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개화파는 일본과 서구 국가들의 근대화 경험을 본보기로 삼아 조선을 개혁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급진 개화파는 이를 위해 정변(政變)을 시도했다.

 

한편, 조선 사회 내부에서는 농민층을 중심으로 한 저항 운동이 점차 확대되었다. 조선 후기 농민들은 지방 관료들의 부패, 가혹한 세금, 토지 문제 등으로 인해 생계가 어려워졌으며, 이에 대한 반발로 크고 작은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동학(東學)이라는 새로운 민중 종교가 등장하였으며, 동학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농민 운동이 1894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처럼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후기 개혁과 저항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갑신정변은 위로부터의 개혁 운동으로, 지식인과 정치 개혁 세력이 주도한 근대화 시도였으며, 동학농민운동은 아래로부터의 민중 혁명으로, 농민들이 직접 불합리한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해 일어난 운동이었다. 두 운동 모두 조선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으나, 외세 개입과 내부 세력의 갈등 탓에 실패하고 말았다.

 

2. 갑신정변: 개화파의 근대화 시도와 좌절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은 조선의 급진 개화파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정변을 일으켜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려 했던 사건이었다. 개화파는 조선이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근대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갑신정변의 중심 인물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 급진 개화파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근대화를 본보기로 삼아 조선의 정치·사회·경제 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1884년 12월 4일, 급진 개화파는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친청 세력인 민씨 정권(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을 제거하고, 고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는 새로운 개혁 정강을 발표하였으며, 주요 개혁안은 다음과 같았다.

  1. 청나라의 내정 간섭 배제
  2. 근대적인 내각제 정부 수립
  3. 문벌 폐지 및 인재 등용
  4. 국가 재정 개혁
  5. 신분제 철폐 및 조세 제도 개혁

그러나 갑신정변은 단 3일 만에 실패하였다. 이는 조선의 정변에 개입한 일본과 청나라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개화파는 일본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일본군의 병력이 부족했고, 청나라가 즉각 대응하여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개화파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청군의 반격으로 갑신정변은 진압되었으며, 개화파 지도자들은 처형되거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조선이 외세의 압력 속에서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와 일본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졌으며, 개화 운동도 점진적인 방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3. 동학농민운동: 민중의 저항과 사회 개혁 요구

갑신정변이 위에서의 개혁 시도였다면,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1894년)은 아래에서의 개혁 운동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후기 농민들이 부패한 관리와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저항하며, 사회 개혁과 조선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일어난 대규모 민중 운동이었다.

 

동학은 최제우(崔濟愚)가 창시한 종교로, 불교·유교·도교 사상을 결합한 민중 중심의 종교였다.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신분 차별 철폐와 민권 신장을 주장하였다.

1894년,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은 본격적으로 봉기하였으며, 전봉준(全琫準)이 이끄는 농민군이 전라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들은 고부 농민 봉기(1894년 1월)를 시작으로 조선 정부에 개혁을 요구하며 전투를 벌였다.

 

동학농민군의 주요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1. 부패한 탐관오리 처벌
  2. 토지 개혁을 통한 농민의 생계 보장
  3. 신분제 철폐 및 평등 사회 구현
  4. 외세(특히 일본과 청나라)의 간섭 배제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며 조선 정부를 위협하는 수준까지 성장하였으나, 조선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본 또한 이를 빌미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며 청·일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결국 청·일 전쟁(1894년 7월)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본격적으로 내정 간섭을 시작했다.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일본군과 조선 정부군의 연합 공격으로 진압되었으며,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4.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후기 근대적 개혁과 민중 저항이 동시에 나타난 중요한 사건이었다. 갑신정변은 실패했지만 근대화를 위한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하였으며, 동학농민운동은 민중들이 직접 사회 변혁을 요구한 최초의 대규모 혁명 운동이었다.

 

이 두 사건 이후 조선은 더욱 급격한 변화 속에 놓이게 되었으며, 결국 1897년 대한제국의 수립과 1910년 일본의 강제 병합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근대적 개혁과 민족 자주 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갑신정변과 동학농민 운동 : 운동과 저항의 갈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