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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전역과 분단: 감사 군정과 38선의 형성

by snowflake-blog 2025. 3. 11.

1. 해방과 전후 질서: 한반도의 새로운 시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조선은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해방은 자주 독립이 아닌 외세의 개입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미소(美蘇) 양국이 주도하는 군정(軍政)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해방 이전, 연합국은 전후 처리 과정에서 한반도의 정치적 미래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상태였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카이로 선언)에서 미국·영국·중국은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해방시킨 후 독립시킨다”고 발표하였고,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에서도 같은 원칙이 재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은 조선의 즉각적인 독립이 아니라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를 거친 후 독립을 보장한다는 의미였다.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이후, 한반도에는 공백 상태가 발생하였으며,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남한과 북한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45년 8월 10일, 미국 국무부와 전쟁부는 한반도를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할 점령하는 방안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소련군은 8월 24일 평양에 진주하였고, 미군은 9월 8일 인천을 통해 서울에 상륙하며 한반도는 미·소 양국에 의해 각각 분할 점령되었다.

 

38선의 형성은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대립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이는 이후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6·25 전쟁)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 미·소 군정의 전개: 남과 북에서의 통치 방식 차이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군정(군사 정부) 체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미군은 남한에서, 소련군은 북한에서 각각 통치하며 서로 다른 정치·경제·사회 체제를 도입하였고, 이 과정에서 남북한의 이념적 차이가 심화되었다.

(1) 소련의 북한 군정: 사회주의 체제 구축

소련은 1945년 8월 24일 평양에 진주한 이후,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친소(親蘇) 정권을 수립하는 방향으로 군정을 운영하였다.

  •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 육성: 소련은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인 김일성을 북한 정권의 중심 인물로 내세우고, 그를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키워나갔다.
  • 토지 개혁(1946년): 북한은 1946년 무상몰수·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대규모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지주 계급을 해체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였다.
  • 산업 국유화: 주요 산업과 공장을 국유화하여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확립하였다.

소련의 군정 아래 북한은 급속한 사회주의화가 진행되었으며, 이는 이후 북한 정권 수립(1948년)으로 이어졌다.

(2) 미국의 남한 군정: 자본주의 체제 유지

미군은 1945년 9월 8일 인천을 통해 서울에 상륙한 뒤, 대한민국을 통치하기 위한 미군정(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을 수립하였다.

  • 친일파 활용과 사회주의 세력 탄압: 미군정은 행정 공백을 막기 위해 일제강점기 관료 및 친일파를 일부 등용하였으며, 이는 한국 사회 내부에서 큰 논란을 불러왔다.
  • 좌익 세력 탄압: 미군정은 조선공산당 등 좌익 세력을 탄압하며 자본주의 기반의 국가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 토지 개혁 지연: 북한과 달리 남한에서는 토지 개혁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지주 계급이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처럼 미·소 군정은 각기 다른 체제를 도입하였고, 이념적 차이가 심화되면서 남과 북의 갈등이 점차 고조되었다.

 

전역과 분단: 감사 군정과 38선의 형성

3. 38선 분단의 고착화와 미·소 대립 심화

처음 38선은 단순한 군사적 경계선이었으나, 1946년 이후 정치적 경계선으로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한반도에서도 각각의 체제에 맞는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1)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

1945년 12월, 미국·영국·소련은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한 후 독립 국가를 수립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 좌익(신탁통치 찬성) vs. 우익(신탁통치 반대): 국내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좌익과 우익이 극렬하게 대립하였으며,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남북 간의 분단이 심화되었다.

(2) 남북한 분리 행정 강화

1947년, 미국과 소련은 더 이상 협력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각자의 점령 지역에서 별도의 행정 체제를 구축하였다.

  • 남한에서는 미군정의 지원 아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준비가 시작되었고,
  •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 정권이 사실상 수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북 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38선은 단순한 군사적 경계를 넘어 실질적인 분단의 경계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4.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분단의 공식화

1948년, 남과 북에서는 각각 독자적인 정부 수립 절차가 진행되었으며, 결국 두 개의 서로 다른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1)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8월 15일)

미군정과 유엔의 지원 아래,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단독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 초대 대통령: 이승만
  • 정치 체제: 자본주의 및 민주주의 기반의 국가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1948년 9월 9일)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 초대 최고지도자: 김일성
  • 정치 체제: 사회주의 기반의 공산국가

이로써 1948년을 기점으로 한반도는 대한민국과 북한이라는 두 개의 국가로 완전히 분단되었으며, 이후 한국전쟁(1950년)으로 인해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었다.

 

결론: 38선의 형성과 분단의 시작

38선은 본래 군사적 점령선이었지만, 미·소 군정이 전개되면서 정치·이념적 경계선으로 변화하였다. 결국 1948년 남북한이 각각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며 한반도는 분단 국가 체제로 굳어지게 되었고,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남북 분단의 기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소 간의 냉전 경쟁은 한반도의 분열을 심화시켰으며, 한반도 문제는 단순한 지역 갈등이 아니라 국제적 냉전 질서 속에서 형성된 구조적 문제로 자리 잡았다.